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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과 목조미륵반가상 본문

되짚어보는 일상

석굴암과 목조미륵반가상

꽃노래 2016. 8. 23. 22:40

 

중학교시절 교과서를 통해 처음 본 목조미륵반가상은 국내 예술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였다. 예술품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술이 미개한 일본에 전해져 그들을 계몽했다는 문화우월주의의 산물이었다. 적어도 당시 내가 받아 들이긴 그랬다. 역사교육의 목적이 그랬고 그 시절의 교육이 그러했다.

이번 일본여행은 목조미륵반가상에 가장 큰 기대가 걸려있었다. 서수적 의미와는 무관하지만 일본의 국보1호라는 사실과 5년 전 경주에서의 충격이 가장 큰 이유이다. 교과서를 통해 보았던 말간 얼굴에 그 알듯 모를듯한 표정의 목조미륵은 중학교시절 이후 거의 완전히 내 기억속에서 사라져있었다. 그런데 2011년 8월 토함산 깊은 기슭에 평온하게 자리잡은 석굴암을 보자마자 충격과 함께 떠오른 것이 바로 목조미륵반가상이었다. 왜 갑자기 기억저편에 사라진듯 박혀있던 미륵의 모습이 떠올랐을까. 단지 부처라서?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론 무언가 깊게 와닿던 연결고리의 개연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누각으로 '잘못' 지어진 석굴암 입구로 들어가서 출구로 나오기를 몇 번, 경주로 수학여행 한번 와본 적 없던 서른살 청년이 난생 처음 석굴암을 마주하여 받은 충격과 감동은 부족한 인간의 언어로는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에는 그것을 예찬하는 노래와 시(詩)들이 있지만, 석굴암을 노래하는 시가가 없다는 것은 분명 언어의 한계를 반증한다. 석굴암으로 말미암아 불현듯 미륵반가상이 떠오른 것이 우연일까. 어쩐지 미륵반가상을 직접 내 눈으로 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관광객들이 잘 모르기도 하겠거니와 안다고하더라도, 볼거리 많은 교토에서 일정을 쪼개 서쪽 구석의 작은 절 광륭사까지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덕분에 여름날 아침의 광륭사는 오로지 태양과 매미의 것이었다. 청년같은 태양빛은 짖궂게 떨어져 세월을 닮은 회색 바닥으로 순화되어 온기만이 남는다. 쨍하게 허공 찢는 소리를 내는 쓰르라미 대신 조금 느긋하게 박자를 타는 매미가 아직 익지않은 단풍나무에 매달려 이 절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쉼 없이 찍어대는 카메라에는 고찰이 순화시킨 여름볕의 온기와 방문객에게 화답하는 매미소리가 담기지 않는다. 찰칵 소리만 허무하니 애석한 일이다.

한때 장대한 사찰이었을 광륭사도 폐불훼석의 철퇴를 맞아 지금의 규모로 재정비 되었다. 아름다운 정원도 잃어버리고 반쪽짜리 절이 된 것이야 안타깝지만, 지금의 간이역같은 정연한 모습의 광륭사가, 어쩌면 더 보석같은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부에서는 촬영이 금지라며 카메라를 단속하는 안내인을 지나 지체없이 들어선 영보전은 나무향이 짙었다. 촘촘히 여미어진 흑갈색 복도에 첫발을 내딛었다. 예고없이 상영이 시작된 영화처럼 갑작스레 폐포에 나무의 깊숙한 향이 닿으며 1400년의 시간을 조우한다. 왼쪽으로 돌아 들어간 복도 한켠에서 근엄한 사천왕이 우리 일행을 맞는다.  죄를 지은 사람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는것 같다. 마음 한켠에 일렁이는 두려움은 나의 죄로부터 기인한다.  지은 죄 많은 내가 험상궂은 수호자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보전의 중앙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의 신성한 존재에 닿는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게 아니라 시간을 견뎌 현재까지 존재해온 위대한 과거에 닿았다. 목조미륵반가상을 표현한 좋은 예가 떠올랐다. 유홍준교수가 소개한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글이다.

 

"이성과 미의 이데아를 표현한 고대 그리스의 신상도 로마시대 종교적인 조각도 인간 실존의 저 깊은 곳까지 도달한 절대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미륵반가상에는 그야말로 극도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음을 봅니다. ..... 나는 오늘날까지 몇십년간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

 

득도의 순간을 입가에 머금은 절대자를 바라보며, 난 다시 석굴암을 떠올렸다. 이 둘의 어떤 공통점이 나로 하여금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절대자의 존엄성을 뛰어넘은 친근함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염없이 불상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후배 성민이가 던진말의 파장이 컸다.

'이걸 엄마랑 같이 봐야되는데, 엄마 생각 나네.'

 

한마디 말에 비로소 내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아! 어머니. 어머니...

내눈에 담긴 석굴암은 아찔할 정도의 고결함도, 절로 허리가 숙여지는 공경감도 아니었다. 그저 마주한 것 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질것 같았고, 그냥 이대로 돌아서서 가버리면 영영 다시 못볼 것만 같은 서러움.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으며, 그냥 한마디만 던져도 끄덕끄덕 고개로 응답해 줄 것같은 그런 존재. 어릴적 낯선곳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저멀리 보이는 어머니 얼굴에 나도몰래 서러워져 훌쩍이듯이 나는 석굴암에서 어머니를 보았던 것이다. 중학교시절 가까이 있지 못했던 어머니의 품을 어쩌면 역사책 사진속 미륵에 나는 투영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목조미륵반가상의 모습은 그래, 그저 언제고 나를 받아줄 것만 같은 어머니의 품. 어머니의 손. 어머니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아낌없는 사랑과 헌신은 절대자의 모습 그대로였고, 내가 언제고 갚아야하지만 갚을 길 없는 만고의 빚이었다. 그 송구할 정도의 감사함과 숙연함을 나는 석굴암과 목조미륵반가상을 통해 보았던 것이다.  

 

어머니와 미륵을 번갈아 보며 마음속으로 한참을 울다가 돌아나오는 길에 성민이는 영보전 앞에 진열되어 있는 부적들을 보고 서성였다. 200엔, 우리돈으로 2,000원으로 가격이 매겨진 부적은, 금색실로 수놓인 빨강, 파랑 비단주머니 모양이었다. 소원을 성취해주거나 소지자를 보호해주는 그런 것이다. 성민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 우리엄마 저거 사다드리면 좋아할텐데... 살까 말까.. 막상 돈주고 샀는데 저 안에 아무것도 안들어있을까봐 못사겠네요'  

아들은 어머니를 지켜주겠다고 생각하면서 부적을 믿지 못했고, 어머니는 부적없이 잘도 아들을 지켜왔다.

 

1400년을 굽어 지켜온 미륵은, 힘이들 때 마다 민족의 서러움을 보듬어 준 모두의 어머니였으리라.

 

 

▲   사진 작가 '오가와 세이요' 가 담은 목조미륵반가상 (1925년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