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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滿秋) - 깊은가을 [2013.3.9] 본문

영화 이야기

만추(滿秋) - 깊은가을 [2013.3.9]

꽃노래 2016. 1. 6. 22:51

 

김태용 감독의 만추. 영어로 레이트 아톰, 늦겨울이다. 제목 자체를 풀이하자면 '한 가을' 이나 '깊은가을' 정도가 되지 싶다.
유홍준 교수는 광주비에날레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관광 가이드를 해주면서 한국의 절이 '깊은 산(deep mountain)' 에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깊은산' 은 없고 '높은산(High mountain)'이 있다고 외국인들이 그의 영어를 교정 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사를 돌아보고 나서야 깊은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만추도 마찬가지로 늦겨울 이라는 표현 만으로는 영화속에 펼쳐진 가득찬 가을의 외로움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오로지 '만추'라야만 그 느낌을 다할 수가 있다. 문학작품에 있어 원어의 중요성이다. 만추라는 작명센스는 이현승 감독의 '시월애' 만큼이나 탁월하다.


시애틀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그들의 그야말로 번갯불 같은 만남은 시종일관 가을의 느낌과 함께한다. 안개자욱한 시애틀의 날씨와 낡은 바바리 코트가 세피아톤의 영상과 어우러져 러닝타임 내내 '깊은 가을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 하면 자유의 도시 '뉴욕' 과 광활한 서부 정도의 이미지만 갖고 있던 내게 '시애틀' 은 그렇게 영화 만추를 통해서 깊고 진한 기억과 약간의 동경을 갖게 해주었다.

 

 

 

남편을 죽인죄로 옥살이를 하던 애나(탕웨이)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외출을 나와 우연히 훈(현빈)을 만나게 된다. 사랑에 배신당해 우발적 살인을 하게되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사이에서도 겉돌고마는 애나는 '내 삶에 다시 사랑은 없다' 라고 말하는듯 표정없는 얼굴과 흐린 눈빛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차갑게 닫힌 애나의 마음에 조금씩 훈이 다가간다.

 

 

훈은 여성에게 기쁨을 주는것이 직업인 호스티스, 소위 '제비' 다. 그래서 애나에 대한 그의 접근은 다분히 직업적이고 호기심 가득하다. 그런데 똑같은 호스티스 이지만 영화 비스티보이즈의 하정우와 조금은 성격이 다르다. 노골적으로 '뜯어먹는' 남자라기보다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접대' 하는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로운 여자의 마음을 녹여 치유해준다는 의미로서 보다 긍정적이고 관객으로서 부담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찌질하지 않다. 심지어 처음만난 애나에게 버스비가 없어서 30불을 빌리면서도 심지어 멋있다. 훈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손님'을 진짜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마음을 다한다.

 

애나는 초지일관 '나쁜남자' 때문에 힘들어한다. 탕웨이의 고통은 사랑으로부터 왔고, 이 사랑은 두 나쁜남자 (옛 애인, 훈)의 흔적이다. 훈이 자상하고 사려깊은데에다가 매력적이기 까지한 훈남이지만 애나의 곁에 남지 못한채 상처를 주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나쁜남자가 됐다. 애나의 옛애인 역시 깜짝 놀랄만큼 준수한 외모와 중후한 목소리를 지닌 멋진 남자지만 결국 사랑했던 애나를 떠났고, 그리고 결혼 후 잘 살고 있는 애나에게 다시 찾아와 그녀를 파멸로 이끈 명백한 나쁜남자다. 무엇보다 자신때문에 옥살이를 한 애나를 다시 마주쳤을 때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당시의 자신을 변명하며 당당하고 뻔뻔하게 이런 인사를 건넸다.

 

 

 

"세월은 참 빨리 가지.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

"나한텐 많은 일들이 없었어요."

 

 

 

주어진 상황에 따라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복역했던 신영복 교수는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에서 자유가 제한된 하루하루의 생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1년은 짧고 하루는 긴 생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나날도 돌이켜보면 몇 년 전이 바로 엊그제 같이 허전할 뿐, 무엇하나 담긴것이 없는 생활. 손아귀에 쥐면 단 한줌도 안되는 솜사탕 부푼 구름같이, 생각하면 약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

 

 

 

애나는 이렇게 손에 잡히지도 않는 생활속에서 가슴속 사랑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하루하루를 보내왔을 것이었다. 옛 애인의 '시간이 참 빨리가지' 라는 무심한 말은 그녀의 도둑맞은 8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말일 수 밖에 없었다. 애나는 나쁜남자를 기다렸고, 그 기다림이 통째로 애나의 고통이 된다. 사랑하는 만큼 고통이 커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그 고통은 한번에 두명으로부터 오지않는다는 점 정도랄까.

 


훈이 여자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치유하는 수단은 다름아닌 '대화'이다. - 남자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훌륭한 외모는 논외로 하자 - 그는 이해와 소통이 전제되지 않더라도 '대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을 치유하고 심지어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차갑게 식어있는 애나의 마음을 열릴때 까지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심지어 이름조차도 직접 묻지 않았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에 귀를 기울이며, '하오, 화이'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애나는 꼭꼭 닫아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훈을 사랑하게 된다. 훈 때문에 바람난 아내를 잃고 분노하여 훈을 잡으러온 남편이 '아내와 무엇을 하였느냐' 고 묻자 훈은 '대화' 를 하였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아내의 부정앞에 남편에게 중요한것은 '어떤 행위' 였지만, 정작 무서운것은 대화로 빼앗긴 여자의 '마음' 이었다.
결국 훈은 자신의 그 '게임' 과도 같은 '대화'로 한 사람을 살리고 또 한사람을 죽게 만든다.

 

애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알게된 훈은 애나에게 '출소하는날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한다. 마치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준세이와 아오이가 10년후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 라고 약속한 것 보다 더 절박하고 애절했다. 두 사람이 과연 만날까 못만날까. 애나가 다시 그 까페를 홀로 찾아가 앉아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그를 기다릴때,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고, 나도 같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도대체 올까. 안올까. 오면 어떤 표정으로 서로 만날까. 못만나면 애나의 그 뒤의 삶은 또 어떻게 될까.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살아가다 우연히 언제 또 만나게 될까. 차라리 다시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간직한채 살아가는게 더 나을까.

 


 

초조하게 다음 신을 기다리는데,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애나의 '잘지냈어요? 오랜만이에요' 라는 독백과 함께 영화는 끝나지 않은 듯 끝나버린다. 깊은 가을에 그렇게 불같이 스쳐간 인연은 결국 관객의 판단에 맡겨졌다.

 

 

 

계절에 따라 찾는 영화,
겨울에 러브레터를 본다면, 가을엔 만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