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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애를 다시 보다. [2011.12.24] 본문

영화 이야기

시월애를 다시 보다. [2011.12.24]

꽃노래 2015. 8. 7. 14:03

2011년 크리스마스 이브. 시월애를 다시 보았다. 그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좋은책을 다시 읽을때의  의미가 전과 다르고 매번 밑줄치고 읽어도 새로운 부분이 눈에 들어오듯 좋은 영화도 그 감동과 의미가 퇴색하기는 커녕 오히려 깊이를 더한다.

 

사랑이라는 주제와 시간이라는 매개를 합쳐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제목 [時越愛] 으로 영화가 단도리 되어있다. 글을 잘쓰는 사람은 '제목' 에서부터 그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가 돋보이는데 뜻글자인 한자의 힘을 빌어 이현승 감독은 경탄스럽게 제목을 빚어내었다. 돋보이는 작명센스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시간을 뒤틀어 매체가 되어주는 우체통으로 심지어 생명체도 오간다. 두마리의 물고기를 사서 한마리씩 나눠 갖기도 하고, 원래는 한마리였어야 하는 강아지 '콜라' 는 각각의 시간에 두마리가 존재한다. 하나가 곧 둘이고, 둘이 곧 하나이기도 한 이 상징은 짐작컨대 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성현과 은주의 슬픔과 고통이 곧 하나이며, 끝내 사랑과 고통도 결국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쓸쓸히 홀로 서있는것 같은 일마레가 그토록 따뜻하게 느껴졌던건, 그속에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어요.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은 하나라고 생각해요.

 

성현과 은주는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을 주고 받는다. 성현은 요리를 하라고 알려주고 은주는 빨래를 하라고 알려준다. 때로는 아주 일상적인 나의 본래 모습을 찾는 과정 - 주변을 정돈하고(빨래) 새로운 외부의 자극을 스스로 부여하는것 (요리) - 을 통해 슬픔을 정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은주가 옛애인의 결혼소식을 듣고 절망할때,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성현의 숨이 끊어질때 보이는 눈물은 결국 모든 슬픔을 정리하는 방법은 눈물임을 이야기한다. 빨래고 요리고 결국은 다 잊고자 발버둥 치는것에 불과할 뿐, 눈물흘리고 그 감정에 충실한 것이 모든 슬픔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자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대응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사랑한 사람이 더 상처 받는 것 같지만 종국엔 사랑하지 못했던 후회가 더 크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성현씨. 사람에겐 숨길수 없는게 세가지 있는데요. 기침과, 가난과, 사랑. 숨길수록 더 드러나기만 한대요.

그렇지만 모두 감추고 싶은때가 있잖아요. 저는 그때 그냥 울어요.

그러다 머릿속이 멍해지면 또 울고. 사랑한다는건 스스로 가슴에 상처를 내는일인것 같아요.

 

시간을 오가는 비현실적인 이 영화 안에서 두 주인공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은주는 매일 성우학원에 가기 위해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탄다. 성현은 은주를 처음 만나는 그 순간. 호기심이 사랑으로 바뀐다. 긴생머리에 여신포스의 전지현을 보고 그 소유욕이 발동하지 않으면 이상한거다.

은주는 성현의 감정을 거스른 - 옛애인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 애꿎은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이와 마지막 만났던 까페 앞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던 성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착하고 뭐고 그냥 이쁘면 장땡이고 나쁜여자에 끌린다는 이세상 대부분 남자들의 코드와 내 상처에 함께 아파하고 내게 헌신하는 남자의 '사랑' 을 알게된 순간 사랑에 빠진다는, 너무도 당연한 소스가 사랑의 기점이 되기에 영화는 관객의 마음에 한걸음 다가간다. 비현실 같지만 너무도 현실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은주는 홀로 놀이공원에 가서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고 전력질주 한 뒤 바이킹을 탄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스릴을 만끽하는 것이다. 새로운 자극이다. 

성현은 버스를 타고 보문리를 찾아가 물목에서 하차한 뒤 가로수길을 거닐다 지칠무렵 나타나는 깨끗한 까페에서 와인을 마신다. 서로 심신을 달래는 새로운 방법에 흥분하고 공감하지만 결국은 공허해진다. 혼자이기 때문이다.  혼자 해도 너무나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이지만, 둘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서로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도 결국은 그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단 나만의 기억이 아닐지라도 그 행위속에 감춰진 외로움이 두 주인공의 가슴을 순식간에 뒤덮는다. 

 

시간을 거스른 교감과 만남은 고금을 막론하고 흥미로운 소재임에 틀림이 없다. 소설이건 영화건 이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것은 미래를 알고싶어하는 호기심과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미련이 그만큼 근본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수준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시월애.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날 부터 웬 청승인가 싶지만, 다행히 혼자가 아니기에 감정적 사치라고 해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