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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보는 일상

할머니의 목소리

꽃노래 2018. 6. 1. 14:03

 

'빨리 땅속에 들어가야 끝날 일인데 목숨만 길어지니 환장할 노릇이지'

할머니는 또 살아있음을 원망한다. 한줌 모래알로 흩어질 것 같은 나날들을 보내는 할머니에게 늘어난 기대수명은 죽음보다 무거웠다. 3남1녀를 슬하에 두었건만 벌써 두 아들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세월은 그저 뒤를 돌아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남은 자식들이 서운할까 죽은 아들을 다시 입에 담지 않는다. 그저 묻은 가슴으로 삼킬 뿐이다. 할머니는 가끔 먼곳을 보며 홀로 우셨다.

'이번에 나좀 너네 집에 가 있으면 안되겠냐. 고모집에만 있으려니 고모도 나도 서로 답답하기 그지없다.'

할머니는 조심스레 운을 뗀다. 금이야 옥이야 얼르고 내손으로 기른 손자가 할머니는 어쩐지 점점 어렵다.
자식들의 수고로움이 우려스러워 한 집에 오래 머무르길 조심스러워하는 할머니는,  스스로 원망의 목소리를 빚어 듣는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입모양을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때문에 배에 힘주어 서너번 말해야하는 자식들을 걱정하고 미안해한다.
그리고는 알아듣지 못한 소리를 그저 끄덕거리고 안체 넘어가고 만다.  대화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죄라는 할머니의 푸념에 나는 동조도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역할과 머물곳이 사라진 노년의 공허한 메아리에 몸이 드러나 숨을 길이 없다. 

말 그대로 할머니는 열심히 살아온 죄 밖에 없다. 전쟁을 겪어내고, 시대의 부속품으로 몸을 활활 태워 이른 80대의 삶은 망망대해에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낡은 뗏목일 뿐이다. 스스로 노 저어갈 수 없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으며, 함부로 몸을 던질 수도 없는 명백한 조난. 피를 팔고 뼈를 깎아 자식을 먹이고, 열심히 살면 복이 온다는 희미한 빛을 따라 용기를 잃지 않고 여지껏 인생을 밀어왔건만, 돛은 펼쳐지지 않았고, 바람은 저 먼곳에서만 이는 듯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할머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힘 펄펄 나고, 돈 벌어먹던 젊은 시절로만 돌아가고 싶었다. '그땐 참 땅땅 목소리도 컸는데' 할머니는 그리워했다. 

1945년 해방을 맞던 해에 할머니는 12살 소녀였다. 어제일처럼 선명한 그날, 어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때 바뀌었다는 세상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다.
왜정이 끝나 일본놈들이 다 도망간다고 했고, 이제 진짜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무언지 모를 밝은 빛이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조국을 되찾았다는 자존감은 쌀과 보리가 되지 못했다. 사람사는 세상에 사람이 살 수 없어 보였다.
'다 똑같이 힘드니까' 옆사람을 보며 또 몸을 밀고 나아갔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게 아니라고 어른들이 말했다. 그러면서 해방은 차츰 잊혀져 갔다.


2017년,  다시 시대가 바뀌었다고 한다.
미래가 두려운 젊은이들은 광장으로 나갔고, 굳건한 목소리가 온 나라로 퍼졌다.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소란스럽지 않았다. 정연했지만 압도적이었다. 낡은것이 버려지고 새것이 돋았다.
광장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바뀌는지 안바뀌는지, 도무지 어떻게 바뀌는지 알기위해서는 또다시 70년이 지나야 하는것은 아닐까. 
표류하는 삶 속에서 커저가는 군중의 목소리를 할머니는 두려워했다. 무엇을 위한 목소리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할머니는 자조했고,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의 고개저음은 부정이 아닌 갈망의 산물이다. 
포기가 아닌 희망에 기인한 절망이었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너무 많이 지쳤다. 바뀔것만 같았던 나날들이 바뀌지 않았다.
육신의 즙을 내어 일궈온 세월의 성은 허망하고 무심하게 무너져 내렸다. 거친삶을 맨손으로 만져온 할머니는 두려웠다. 


벽두에 외친 한마디말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분명 세상이 그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겠지만,
작은 변화가 일어날 때 진정한 삶을 살게된다고 톨스토이는 말했다. 

이틀뒤면 다시 광복절이다.
이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시대에 닿기를. 

                                                                                              - 2017년 대선이 끝난 8월의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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