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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기행 [2014.8.17] 본문

사진과 여행

부석사 기행 [2014.8.17]

꽃노래 2015. 8. 8. 00:56

퇴근 후 집에 오는길 오늘은 꼭 부석사를 가야겠다 다짐한다.
꼭 두해전 여름에 후배 남형이와 함께 다녀왔던 부석사의 기억이 너무나도 좋아 봄이면 꽃구경, 여름이면 산들바람, 가을이면 단풍, 겨울이면 눈덮인 부석사를 그리며 가야지가야지 했다. 금요일 비교적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 아홉시. 아내와 바삐 밥을 챙겨먹고 무작정 떠나자고 채근했다.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가려 하였으나 그래도 알려야 할것 같아 부석사를 간다 했다.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달리 할일을 계획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10시에 출발해 꼬박 3시간을 달려 영주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자가용으로 고속도로를 내리 달려 내려온데다가 깜깜한 밤이라 주변 풍경하나 돌아볼 새 없어 여기가 서울인지 영주인지 긴가민가 했다. 새벽 1시의 영주 시내는 조용했다. 금요일밤을 불태우기 바쁜 서울의 모습에 대조하여 서울이 아님을 인식했다.

사실 3시간만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를 바삐 갈아타며 도착한 영주는 옛날로 치면 남한산성과 치악산, 소백산맥을 넘어야 하는 500리 멀고 먼 길이다. 평지를 기준으로 하루 12시간씩 쉬지 않고 꼬박 걸어도 닷새가 걸린다.

2년천 처음 영주에 왔을 때 도로망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 졌지만, 심리적 거리는 오히려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자식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들을 통해 끈덕진 생계와 그리움을 보았다. 밥벌이라는 미명아래 피붙이를 서울로 올려보낸 부모들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필연적 귀결성으로 하염없는 기다림을 예약했다. 매주 주말마다, 그리고 명절에는 더욱 특별히 터미널에서 발을 동동구르며 자식이 도착하는 차 시간을 기다린다.


부석사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올라가는 길목에서 장사할 채비를 하는 노인들은 꾸역꾸역한 생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영주의 비옥한 땅에서 손으로 일군 과일 하나하나를 좌판에 깔고 그저 맛있다며 과일 자랑을 하는것이 보람이라기 보다는 고달픔에 가까워 보였다. 노년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굽은 등을 깔고 좌판에 앉은 노인에게 과일 하나에 또다시 흥정을 하려는 손님들은 잔인하다. 화폐 앞에서 둘간의 관계는 대등해 지지 않는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아쉬운 입장이 심리적으로 약자가 된다. 좌판을 깔고 있는 할머니들이 많을 수록 할머니들은 과일을 더 팔기 위해 등이 굽어갔다.

우리는 둘이 먹기에 5개 5천원어치는 많아 2천원에 2개만 달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마수걸이라며 2개만 파는것을 아쉬워하셨는데 먹다남은 사과가 짐 될 것이 성가셔 끝내 2개만 사들었다. 아내는 '마수걸이'의 뜻을 몰랐다가 나중에 그 뜻을 알고는 크게 안타까워했다. 그런 뜻인 줄 알았으면 5개를 다 사는것인데 라며. 나도 후회하였다.

 

현지에서 갓 수확한 풋사과는 온땅의 생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베어물자마자 입안에 가득 퍼지는 초록색 달큰한 향은 내가바로 사과요. 당당했다.
서걱서걱 씹어먹으며 부석사를 향해 올라갔는데 금새 다 먹고 없어진 사과가 아쉬웠다. 쩝쩝 애석한 입맛만 다시고 끈적하게 남은 손의 사과냄새를 맡아 보았다. 사과의 가격또한 서울에서 사먹는 가격의 딱 반 이었다. 그간 복잡했던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부석사를 찾았는데, 사과하나를 씹으며 이걸 다 싸게 떼어다가 서울에 갖다 팔면 돈을 벌겠다. 생각하는 자신에 웃음이 났다. 틈만나면 어떻게든 먹고살 궁리를 하는것이 좋은것인지 나쁜것인지.

 

일주문앞에 늘어선 은행나무는 아직 푸르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만추 일주문의 노오란 절경은 그냥 노란빛이 아니라 노란 형광색에 가까웠다. 2번의 부석사 방문이 모두 여름인지라 유명한 이 일주문 은행나무의 제빛깔을 아직 보지 못한것이 못내 아쉽다.
아쉬움이 오히려 사랑을 가져온다 했던가. 올가을에 한번 더 부석사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수북하게 깔린 노란색 낙엽이불을 밟으며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예쁜 사진을 찍을 것이다.

 

산을 그대로 깎아 터를 잡지 않고 산의 형상 그대로 일주문, 범종루,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까지 지어올린 디자인적인 센스는 누구의 실력인지 모르겠다. 더욱이 건물의 위치와 방향등이 변화무쌍한 이 형태는 등뒤의 봉황산과 합쳐져 그대로 신비롭다. 획일적이지 않은 배치에 각도마다 새롭고, 건축물은 자연속에 그대로 옮겨져 자연을 닮아있다.
의상대사가 지어놓은 부석사라고 이름붙어 있지만 실제로 의상대사가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모두 맡아서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름난 목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의 실력과 정성은 불심에 가려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최근 오스트리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아내는 서양과 달리 아시아권은 유명한 건축물, 예술품에 장인의 이름이 함께 전하지 못하는것에 아쉬워했다.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다름아닌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경치였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 국토도 문화재로 지정할수만 있다면,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풍광을 국보 0호로 삼겠다고 하였다. 안양루에서 향하는 소백산 산등성이는 해가 넘어가는 남서쪽이다. 매번 오전에 부석사에 오르는 탓에 아직 그 장엄한 일몰을 보지는 못했지만, 소백산 뒤로 넘어가는 해넘이는 모르긴 몰라도 보는이의 영혼까지 빨갛게 물들일 것이다.


저녁빛이 배흘림기둥에 스밀 때 부석사 앞 소백산맥은 무한강산이다.
절이 떠서 부석사(浮石寺) 가 아니라 그 절마당에 사람이 둥둥 떠서 부석사인것 같다.

- 소설가 김훈 -


인간 백세에 몇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있네

- 방랑시인 김삿갓 -

 

 

유홍준 교수는 재미있는 가설을 세웠는데, 오히려 이러한 호방한 경관때문에 절(寺) 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상대사 이래 부석사에서 큰 스님들이 나오지 않은 점과 방대산 스케일의 부석사에 기거하는 스님이 많아야 서너분 밖에 되지 않는 점을 두고
부석사는 일시의 수도처는 될 수 있어도 상주처로는 적당치 않다고 하였다. 쉽게말해 맘잡고 공부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딴생각 들도록 하는 절이라는 것이다. 면벽수행하여야 하는 수도승에게 눈아래 펼쳐지는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은 넘어야할 산이고 견뎌야할 수행이었다.
15살에 비구니의 삶을 시작하여 피끓는 청춘의 설렘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속세로 돌아간 당나라 시인 '설요' 의 반속요(返俗謠)가 떠올랐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 설요 -


아내는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버리고(?) 온 선묘 아가씨를 두고 애달퍼 했다. 같은 여자로서의 공감이다. 의상대사가 선묘의 정성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는지, 아니면 줄듯 주지 않은 희망고문을 하였는지, 또는 함께 실컷 지내다가 떠날때가 되어 무자비하게 버렸는지 지금으로서는 알길이 없지만 순진한 여성의 지고지순한 마음에 불을 당긴것은 기록에 의한 사실이 아닌가.
하지만 의상은 현실속에 녹아든 원효와 달리 지극히 이상적인 불토를 꿈꾸었고, 그의 그러한 완강했던 성향으로 볼 때 후자쪽은 다소 가능성이 낮지 않나 생각된다. 어쨌든 지난 일은 알수 없지만 아내는 왜인지 분개했다.


처음 부석사를 알게 된것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라는 책을 통해서 이다. 부석사에서 나와 내려오는 길에 한 음식집에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는데, '유홍준 답사 일행이 다녀가는 집' 이라고 적혀 있는게 아닌가. 2년 전 처음 이 집을 발견하고 후배 남형이와 들러 파전에 도토리묵, 막걸리를 시켜 먹었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아내와 함께 들러 같은 메뉴를 주문하였다. 아내는 '이런 맛'이 좋다며 즐거워했다.

 

2년 전에 할머니 두분이 운영을 하고 계셨고, 홀에서 한눈에 보이는 주방쪽에 사람 키만한 화분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화분에는 화환처럼 곱게 묶인 리본이 걸려 있었는데 '어머니 사랑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도 어버이날에 자식들이 찾아뵙지 못하고 화환을 보낸 모양이었다. 자식 얼굴 대신 화환이 놓였지만, 그것도 자랑이었다. 처음에 꽃이 피어있었을 그 화분은 우리가 보았던 8월에 벌써 3개월이 지나 꽃이 지고 푸른 잎만 무성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화분은 온데 간데 없고, 화분에 걸려 있던 리본만 식당 기둥에 묶여 있었다. 화분은 죽어서 버렸어도 자식이 적어놓은(직접 적은것은 아니겠지만) 리본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기둥에 묶어둔 것이다. 부모의 마음 이었다.


부석사에 오를 때 부족했던 사과의 여운이 남아 내려오는길에는 복숭아를 샀다. 흰색 모시를 입고 부채질을 하시던 중년의 아주머니셨는데, 얼굴이 희고 손의 마디가 부드러운것을 보아 오로지 농사가 생계수단인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여쭈어볼까 하다가 실례가 될까 자제하였다. 집에 가져와서 복숭아를 한 입 깎아먹자마자 또 후회를 하고 말았다. 더 사왔어야 하는건데.. 달디 단 복숭아는 다 먹은 뒤에도 혀끝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여행 잘 다녀왔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다스리고, 여유롭게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나의 눈과 나의 입만 소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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